노벨상은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화학자인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1833~1896)이 자신이 기부한 유산 3100만 크로나(한화40억여원)를 기금으로 내어 노벨재단(the Nobel Foundation)이 설립되었다.
매년 12월 10일 노벨이 사망한날을 기리며 인류의 복지에 공헌한 사람과 단체 등에 수여되는 상으로 1901년도부터 문학부문, 화학부문, 물리학부문, 생리학부문 의학부문, 평화부문, 최근에 생긴 경제학부문으로 나누어 시상하는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상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한국여성으로는 처음, 아니 아시아 여성으로는 최초로 ‘한강’이라는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타게 된 것이다. 알다시피 2000년 밀레니엄 시대에 문을 열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실은 시대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받지 않았다고 선뜻 말하지 못할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작가
그러나 문학부문에서 세계적인 문호들을 뒤로하고 젊은 여성으로써 글필하나로 스톡홀롬을 뒤흔들어 놓았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정도의 일이 아니라 필자도 뭐라 표현을 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 오른다.
글필 뿐만아니라 글의 소재도 독창적이고 괴기스럽기까지한 채식주의자는 폭력에 맞선 한 여자의 내면을 파헤친 작품이다. 그런 한강 작가를 당당히 다음과 같은 이유로 수상자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 한강은 자신의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고, 각 작품에서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합니다. 그녀는 신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innovator)가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인류문화에 대대손손 역사로 남아 한국민의 자부심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식 뒤에 들려오는 반대편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혹자들의 말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런 해게망측한 말들이 나오는 것일까? 5.18를 소재로 한 것? 지극히 선정적인 언어들? 어떤 동료작가는 발벋고 나선 청소년의 유해물 논란? SNL유머 패러디?
전세계에 공인이 된 한강 작가를 대하는 우리들의 현 수준이다. 초인류 국가로 세계 관심이 집중된 우리나라 사람들이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작가를 대하는 것에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심지어 전통적인 신문사가 실어 날르고 이바지 한다.
아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부끄럽기까지 한건 나 뿐인가? 노벨상을 지정 할 때 국적을 따지지 말라는 노벨의 당부만큼은 지킨 당당한 상 앞에서 이게 한국인들이 대하는 태도였다.
나만이라도 한강 작가를 성격적으로 대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도 영락없는 한국인이네. 허나 여기에는 어떠한 진영 논리가 없으며, 그저 있는 그대로, 한강 작가의 본질에 접근 해 보는 것이 그녀에 대한 최소한의 감사 표현이다.
20년 가까이 사람들 성격분석만 해온 필자는 얼굴 생김새만 봐도 대략적으로 어떤 성격유형일것이라는 것이 오랜 연구 끝에 직감적 데이터로 필터링되는데 그녀의 목소리, 표정, 말투, 걸음걸이, 머릿결, 눈빛까지 보이는 것은 바로 바로 분석이 되어 출력되어 나왔다. 그러나 위대한 한국인의 표상이 된 그녀를 바로 어떤 성격유형으로 재단해버리기에 너무나 귀한 상을 받은 수상자이기에 섣부르게 결정 지을수 없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이미 베스트셀러가 됐던 채식주의자 책의 스토리를 소환했다. 오래전이라 읽었던 기억이 있었던가 하면서도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붉은닻. 작별하지 않는다” 등 닥치는데로 검색하여(이미 완판되어 구매 할수도 없음)일면의 작가의 문채와 작가가 추구하는 삶의 표현방식 등을 세부적으로 어떤 의미를 말하고져 하는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떤 교수는 언론에서 한강작가의 노벨문학상이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면서 한강의 문학세계를 이렇게 말했다. "한강의 문학 창작 기간은 벌써 30년이 됐고 성과 또한 그에 못지않다"며 "여성 작가 특유의 세심함과 민감함으로 한국인이 가정과 사회에서 처한 곤경과 겪어온 상처를, 그리고 그들의 불행과 고통을 드러낸다"고 평가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한강은 남녀 성별에 대한 주목을 이미 초월했다"고 했다.
한 교수는 "한강의 소설은 어조가 침울한 편이지만 신기한 힘이 있어 독자가 놓지 못하게 하고, 책을 덮은 뒤에도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고 전했다.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 한강 작가가 만든 국가의 위상은 어디에 비길수가 있는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만 무시하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이미 몇십년 앞서 30여개 이상의 노벨상을 받은 쾌거를 이룬 나라이다.
특히나 생리물리학이나 화학자들이 많이 배출되는 일본의 특성은 기초과학분야에 나라가 지원을 지속적으로 연구 할 수 있도록 육성지원하고 오래 걸리지만 일본인들은 그들만의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다. 전세계가 앞 다퉈 신기술 만들며 성공을 향해 갈 때 이들은 신기술의 위험요소를 더욱 방어하는데 집중한다.
예컨대 사람들 죽어나가도 신문물만 받아들이는 초인류 국가를 표방하며 일본이 따라오질 못하는 신기술 스마트 세상에 우리나라는 너무 앞장서 있다는 것이 큰 우려가 된다.
좌니 우니 한강 작가의 작품을 폄하 할 생각은 너무 극단적이다. 한림원인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권위마저 폄하 할 것인가? 더 이상의 정치 양극화로 문학 작품을 쓴 한강 작가를 도마 위에 올리지 않길 바라며, 문학작품 그대로 있는 그대로 읽어보자.
한강 작가의 책들이 문제라며 아우성 치는 문제가 되는 책들 외에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이런 발상을 했을까? 하는 책들도 살펴보라. 같은 한국인이라는 게 의아할 정도의 작가의 제목은 읽는 순간 소름이 다 돋는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서랍에 들어갈 저녁은 무엇일까? 한강 작가의 오랜 은사였던 교육자는 시를 쓰길 권했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은유를 해왔던 한강을 기억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수없이 필자가 수 많은 강의 중에 인용했던 정현종 시인이고, 방문객 이라는 시는 우리 인간의 평생에 걸친 질문을 던지는 시이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인 것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아 그 시! 맞다. 교보문고를 지날 때 외우던 바로 그 시이다. 인간의 생애에 걸쳐 모든 것을 초월한 시인이라고 매번 감탄하던 정현종 시인이 극찬한 어린 한강 작가를 미리 알아 본 것이다.
감히 누가 그녀를...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 시기에 맨부커상을 수상 후 축하화환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가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상을 거부 할 수 있을 만큼의 작가는 수 많은 세계를 지녔다고는 왜 생각하지 못할까? 물론 굳이 않받을 것 까진 없었다는 것도 한쪽에서 드는 생각이다. 어쨌든 작가는 사상을 담고 강렬히 비판하고 역사를 글로 표현 할 자유가 있다.
작품을 작품으로 보고 해학을 즐기던 우리 조상들의 여유는 찾아 볼 수 조차 없는 것일까? 미래에 다가 올 문학은 시사와 풍자. 해학 등 수 많은 의미를 담아서 직관을 키우는게 아니고 상상 속에 무의식을 어떤 작가라도 자유롭게 창조 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문학의 힘이고, 작가의 상상력이다.
그것을 왜곡하든 일깨우든 작가의 세계를 존중하는게 독자의 에티켓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최소한 현실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수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했을 것이고 수천번 반복적으로 쓰고 다듬어 낸 자식같은 글들일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찌끄리는 문필과는 비교가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이후에 세상 밖에 나올 수 있고, 받아들이는 것은 독자들의 또 다른 상상의 몫이다. 더 이상 진영 논리나 역사 왜곡으로 전체를 오염시키거나 왜곡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보다는 작가가 대문호가 되어 한국을 빛내게 기초를 닦도록 지원해주고 어린시절에 에피소드나 성장과정에 주목해서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다가가는 수준 높은 국민의식을 보여주길 바란다.
필자가 한참 성격연구에 빠져있을 때 개인의 성격분석 보다는 한국 사람들이 가진 국민들의 성격에 관심을 둔적이 있었고, 장기간에 걸친 종단연구 프로젝트를 기획했을때도 한국인들은 1번 완벽주의자 성격유형이 많았다.
날개라 부르는 외적유형은 2번 조력가, 혹은 이타주의자 라는 요소가 지배적이였다. 즉, 열심히 일하는 과업지향형이라서 전 세계 어딜 가든 한국인의 근면과 성실성은 완벽하리만큼 뛰어나다. 그러나 일만 죽도록 하다가 나처럼 일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지적하고 따지기 시작한다.
거기다가 정은 얼마나 많은지 남에 일에 내 가족들처럼 챙기는 정스러움과 이타성은 끈끈하기까지해서 한국인의 정은 쵸코파이 광고에도 나올 정도로 통하는게 있다. 그런데 이 정 많은 사람들의 특징이 남의 일에 일거수 일투족 관여하기를 좋아한다.
적당히 지켜야 할 선을 넘는 것이 바로 그 것이다. 찐한 사람들의 단점인 것처럼. 성격의 기본 본질은 그대로이나 환경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니 적응력이 뛰어나다고 수용해야 하는 것처럼, 어린시절 한강작가는 언어와 문학에 큰 재능을 타고 나서 영문과를 갈 만큼 영어를 잘했다는 것은 환경에 잘 적응했다라는 것이다.
자기세계 속에서 현실을 바로 볼수 없는 환경이 작가들의 딜레마를 극복하고 기본 본질 외에도 안팍으로 자신을 잘 적응해왔다라는 점에 더 큰 관심 경애심을 갖는다. 맨부커상을 받은 2016년부터 현재 2024년 까지 한림원은 끊임없이 작가의 활동을 주목하고 지켜봤을 것이다.
100년뒤에 개봉 될 미래의 책을 남긴 저자 중에 한 사람으로 세계는 한강 작가를 지목했을 정도다. 한강 작가가 국제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온 사례들은 이미 많은 언론을 통해서 매체 영상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게다가 한국인의 한계였던 언어 번역 장벽의 문제점을 극복했다는 것에도 또 다른 한강, 강물, 시냇물 들이 나올 한국작가의 미래를 밝혀주는 위대한 교두보가 된 것이다. 아무소리 말고 박수치고 지켜보며 한강의 기적을 다 함께 지켜보길 기대 할 뿐이다.